캔터베리대성당 - 영국 성공회의 총본산 Canterbury Cathedral

영국 런던에서 동쪽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하면 켄트주 캔터베리 지방이 나온다. 인구는 5만명이 조금 넘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소도시라 할 수 있지만 교회의 도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영국 교회의 중심 도시다. 특히 이 도시에는 영국 성공회 교회의 총본산인 캔터베리대성당 Canterbury Cathedral, 그 인근에는 세인트 어거스틴 수도원 St.Augustine' Abbey 유적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세인트마틴 교회 St.Martin's Church가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이 3건물을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는데, 소박한 교회의 모습을 간직한 세인트마틴 교회와 로마네스크양식 건물의 극치를 보여주는 캔터베리대성당,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는 세인트 어거스틴 수도원이 이 지역의 교회 부흥과 수난사를 잘 말해주는 듯하다.



5세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에는 카톨릭이 제대로 전파되어 있지 않았는데, 596년 그레고리1세 로마 교황의 명을 받고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과 수도사들은 캔터베리로 들어와 전파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켄트지역 왕의 Bertha 왕비가 이미 이미 크리스챤이었기 때문에 어거스틴 일행은 이 지역을 복음전파의 시작으로 삼았으며, 켄트왕으로부터 캔터베리 동쪽 땅을 부여받아 수도원을 짓게 되었다. 이 시점을 시작으로 캔터베리 지역에서 영국 전역으로 카톨릭이 퍼져나갔고, 이는 영국이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발달하기 시작하는 시발점이 된다. 


초기 신흥종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집권층의 집권에 도움된다면 급속히 확산되다가 어떤 시점을 넘어 자신들의 집권에 오히려 종교가 방해된다고 생각하면 탄압을 하기 시작하는데, 캔터베리지역의 카톨릭 역시 마찬가지의 역사를 밟게 된다. 



세인트 어거스틴 수도원 St. Augustine's Abbey 유적지


이 수도원은 598년 성 어거스틴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켄트의 앵글로색슨 왕의 묘지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수도원으로 개조되었으며, 이후 약 1,000년 동안 영국에서 카톨릭 교리 전파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에 일상적이었던 바이킹의 침략에 초기 건물들은 파괴되기도 했지만 11세기 영국이 노르만의 세력 아래 들어가며 이 수도원도 로마네스크로 알려진 새로운 건축스타일로 재건되기도 했다. 하지만 16세기 헨리8세의 카톨릭에 대한 압박으로 결국 폐허의 길로 들어선다. 


   

세인트 마틴 교회 St.Martin Church


어거스틴이 캔터베리지역으로 왔을 때 당시 Bertha 왕비의 개인예배당으로 사용된 곳이 세인트마틴교회다. 켄트의 왕은 프랑크 지역 출신 Bertha공주와 결혼하면서 Bertha의 종교를 그대로 인정해줬는데, 580년대에 기존에 존재하던 켈트교회를 재건해서 카톨릭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줬다. 성 마틴의 이름을 기리며 이름이 St.Martin Church가 되었다. 성 어거스틴 일행이 도착했을 당시, 수도원과 캔터베리대성당이 지워지기 전까지 미션 전파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캔터베리대성당 Canterbury Cathedral



캔터베리대성당은 Christ Church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유네스코 홈페이지에는 Christ Church라는 표현도 꽤 보인다. 캔터베리대성당은 영국 성공회의 본산으로서 이곳의 대주교가 전세계 성공회 교구의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한다. 그만큼 상징성이 깊은 대성당으로, 성 어거스틴이 수도원과 함께 597년 설립하여 초기 영국 내 카톨릭을 전파하기 위한 중추 교회로서 역할을 하였다. 597년이면 우리나라로 따지만 삼국시대에 해당되는데, 우리나라도 이 때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왔던 것처럼 영국도 유럽 대륙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카톨릭이 전파되는 시기다. 


  

캔터베리대성당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정복왕 윌리엄에 의해 영국 내 노르만 왕조가 자리잡으며 왕권과 교권이 충돌이 일어나면서다. 당시에 영국 인근에는 노르만에 의한 정복 전쟁이 활발히 일어날 때였고, 영국의 왕은 이와 함께 교회가 왕권 확립에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다. 특히 12세기 헨리2세 때가 왕권 강화의 극에 달했을 때인데, 1162년 헨리2세는 교권을 자신의 왕권 밑에 두기 위해 자신의 절친인 토머스 베켓을 캔터베리대성당의 대주교로 임명하게 된다. 하지만 헨리2세의 신임 속에 대법관까지 지낸 베켓은 헨리2세의 의도와는 달리 영국 내 카톨릭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소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교권까지 쉽게 차지하고자 했던 헨리2세는 베켓의 배신(?)에 분노하며, 1164년 "죄인으로 끌려온 성직자의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라는 클래런던 칙명을 발표하였다. 베켓이 여기에 반대하며 헨리2세와 대립하게 되는데, 헨리2세는 왕권에 도전하는 베켓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프랑스의 작은 수도원으로 쫓아보낸다. 이후 교황의 중재로 헨리2세의 베켓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왕권에 반대하는 베켓을 곱게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1170년 이러한 헨리2세의 마음을 알았는지, 헨리2세의 충성스런 신하들이 대성당으로 몰래 들어가 베켓 대주교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 토마스 베켓은 성인으로 추앙받았고, 그의 믿음이 실천된 캔터베리 대성당은 순례지로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주교의 죽음을 애도하는 순례 행렬에 참여하였다. 결국 이는 왕권에도 위협이 되어 헨리2세는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해야 했다. 


이 사건은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인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베켓 대주교가 살해되고, 그를 위한 성지 순례를 하러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당시에 순례를 하면 살아있을 때의 죄를 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퍼져있어 많은 사람들이 순례에 참여했는데, 이 순례에 참여하러 가는 30명의 사람들에게 식당 주인이 같이 참여하며, 순례길이 무료할 수 있으니 각자 4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가장 재미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식당에서 무료로 식사와 술을 대접해 주겠다고 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초서는 약 30년간 이 이야기를 써내려 갔는데 계산대로 하면 총 120개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24개의 이야기만 실렸다고 하니 미완성의 작품일지도 모른다. 



   

캔터베리대성당은 1067년과 1174년에 불에 타 그 때마다 재건되었는데, 첫번째 화재 때 노르만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로마네스크 (잦은 전쟁으로 인한 큰 석재구조, 두꺼운 벽, 작은 창, 둥근 아치 등의 모습)으로 한번 재건축된 뒤에 두번째 화재 때 다시 고딕(뾰족한 첨탑 형식) 양식이 가미되어, 두 건축양식을 함께 갖춘 성당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미 다른 글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헨리8세의 부인 문제로 카톨릭과 의도적인 거리를 두게 됨에 따라 영국의 카톨릭 교회들은 성공회로 개종하거나 아니면 세인트 오거스틴수도원처럼 폐쇄의 길을 걷게 되는데, 캔터베리대성당 역시 헨리8세의 영향으로 로마 카톨릭에서 영국 성공회 교회의 본산으로 변화된다. 아쉬운 것은 이 과정에 베켓 대주교의 무덤이 헨리8세의 명령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지금은 촛불 하나만으로 그의 영혼을 기리고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 교리 문제가 아닌 국왕의 정치적, 개인적 이유로 떨어져 나온 개신교이기 때문에 교리도 실제로 카톨릭과 별 차이가 없으며, 건축물의 특징 역시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화려함에 비하면 다소 약할 수 있겠지만 영국 성공회의 총본산으로 대리석의 기둥들, 스테인드글라스, 지하석실 등은 예술적 가치나 규모면에서도 다른 성당을 압도한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별도로 안내책이 출판되어 있을 정도로 종교적인 의미와 함께 예술적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어 캔터베리 대성당의 볼거리 Top10에도 들어가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지하석실(Crypt)은 영국 내 교회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결혼식 용도로도 사용되어 인터넷에 사진검색에도 많이 보인다. 이런 곳에서 결혼하면 정말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캔터베리성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캔터베리 게이트(Canterbury 대성당의 Gate House)를 지나가야 한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데, 1517년 Goldstone에 의해 지어졌고, 1642년경에 예수 조각상과 Gate는 한번 파괴되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와 다시 복원되었는데, 푸른색의 예수 조각상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눠지는 것 같다. 항상 우리가 봐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이는데, 이런 다양성이 획일적인 종교적 채색에서 벗어나 오히려 더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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