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 3 벨베데레궁전 Belvedere

벨베데레는 아름다운 경치 Beautiful View의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다. (이름 때문에 벨베데레는 오스트리아 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티칸에도 있고, 보드카 등 여기저기 많이 나타난다)


벨베데레 궁전의 시작은 오이겐 공자가 1697년 빈 동남쪽에 거대한 땅을 사서 정원을 지으면서부터다. 그리고 정원에 별장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운테레스Unteres라는 벨베데레 하궁이 지어졌고, 1723년에는 하궁과 대칭이 되도록 오베레스Oberes라는 벨베데레 상궁이 지었졌다. 



이 당시에는 계단과 천장화를 특징으로 하는 중앙 대리석홀이 유행이었는데 하궁과 상궁 역시 화려한 중앙대리석홀을 볼 수 있다. 이후 벨베데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1753년 오이겐 공자의 후손에게서 사들여 궁전Schloss라는 이름을 붙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람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였던 그는 현재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청년에게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지원 덕분에 궁은 더욱 화려함을 가미하게 되었고 1775년부터는 합스부르크의 미술전시장으로도 사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복원을 끝낸 후에는 벨베데레 하궁에는 중세 오스트리아 예술품 전시장과 바로크 박물관이 있으며, 상궁에는 19세기 이후 오스트리아 예술품과 국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상궁의 상설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벨베데레 궁전 정원은 후기 바로크 시대의 정원 디자인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벨베데레 상, 하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상궁과 하궁간의 길다른 공간을 기하학적 문양의 대칭형태를 지닌 정원이 채워주고 있다. 베르사유 정원을 담당했던 알드레 노트르의 제자가 담당했으니 벨베데레 역시 베르사유의 분위기가 물신 풍긴다. 


하지만 그늘이 부족한 정원이기에 한여름에 하궁에서 상궁까지 걸어간다면 걸어가는 중에 지칠 가능성이 크다.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19세기말, 모더니즘이 태동하던 시기, 유겐트 양식이라는 독일의 장식미술 양식 운동을 이끌었던 화가다. (유겐트는 독일어 문화권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호칭한 것으로 스틸, 식물, 곡선을 주요 모티브로 하며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클림트는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 그래서 클림트는 어려서부터 황금색의 화려한 장식품에 매우 익숙했으며, 이는 추후 클림트의 예술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또한 클림트는 주로 여성을 많이 그렸는데, 특히 여인의 누드화가 많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세밀한 여성의 누드보다는 여성들의 구속과 억압, 그리고 이로 부터의 해방이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래서 클림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요부의 이미지와 어머니의 이미지가 동시에 나타난다고 한다. 



빈의 카사노바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많은 여성을 사랑했고, 특히 상류층 여성들과의 염문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주로 상류층 여성들의 초상이 많다.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여성을 만난 클림트, 그래서 그가 56세의 나이로 죽자 어디선가 나타난 14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상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클림트의 작품은 벨베데레 궁 외에도 레오폴드박물관과 빈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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