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4 - 신시가지 바츨라프 광장과 주요 볼거리들

체코 프라하는 카를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며 기존 구시가지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신사가지를 개발하시 시작했다. 바츨라프 광장을 따라 양쪽 옆으로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들이 들어서있어 신시가지와는 또다른 도심의 분위기를 가져다 준다.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을 중심으로 한 신시가지 (이미지출처: pinterest)


바츨라프 광장 Wenceslas Square ((Václavské náměstí)

체코 구시가지에 얀 후스 광장이 있다면 신시가지에는 바츨라프 광장이 있다. 카를4세가 프라하를 확대 개발하며 조성되었으며, 당시에는 별다른 이름 없이 말 시장으로 불리어졌으나 1848년 시인 브로프스키의 제안으로 보헤미아 왕국의 수호성인인 바츨라프1세를 기리기 위해서 성 바츨라프 광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바츨라프 광장 모습 (이미지출처: thousandwonders, Sergey Ashmarin)



 

바츨라프 1세


바츨라프 1세는 10세기 보헤미아 공국의 왕(공작)으로 이 지역의 독립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주변 프랑크왕국의 침공을 막아내는 등 강력한 보헤미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카톨릭을 믿으며 교회의 전파를 위해서 노력했던 바츨라프 1세는 이후에 이교도 귀족세력과 야합한 동생에 의해 젊은 나이에 살해되고 만다. 

나중에 바츨라프 1세의 이러한 노력을 높이 사 카톨릭의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바츨라프 1세의 위대함은 바츨라프라는 이름의 영속성에서도 볼 수 있다. 체코의 초대대통령의 이름도 바츨라프 하벨이며, 프라하 국제공항의 이름이 바츨라프 하벨 공항이기도 하다)


바츨라프 1세의 동상과 국립박물관 모습 (이미지출처: BestPlacesPhoto.com)



광장의 맨 끝에는 국립박물관이 있으며 그 앞에는 바츨라프 1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폭 60m, 길이 약 700m의 긴 광장은 20세기 체코 역사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폐망에 따라 여러 나라로 나눠지며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게 되었을 때 독립선언을 선포하고 체코 시민이 열광하던 곳이 바로 바츨라프 광장이다. 


1918년 체코 독립 때 열광하는 시민들의 모습과 독립기념일에 모인 시민들 (이미지출처: libereckadrbna.cz)



또한 독립 이후 체코는 선진공업도시로서 발전하고 있었는데, 독일의 나치에게는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군수 물품을 조달해 주는 도시였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을 때 나치에 의해 점령되며 나치의 군수기지 사령부 역할을 한 곳도 이곳이다. 


나치에 의해 점령당한 프라하 모습 (이미지출처: Warfare History Network)



그리고 1968년 공산체제 하에서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공산당 중심의 일당 독재에서 벗어나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자 개혁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방 외신들은 이를 프라하의 봄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확산 도미노를 우려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 20만 대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들어왔다. 당시 1천만 정도 인구 밖에 되지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군대가 들어왔다니 당시 공산권 지도부에서 얼마나 위험을 느꼈는지 짐작이 된다. 


프라하의 봄 진압을 위해 침공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군대 (이미지출처: The Milanese)


바츨라프 광장에는 이 때 탱크가 밟고 지나가며 훼손된 도로를 기존 도로와 다르게 포장을 해놓으면서 이 때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혁명은 소련에 맞서지 않는 것으로 조용히 끝났으나 이후에 젊은이들 중심으로 체코의 무기력한 대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분신을 하기도 했다. 바츨라프 광장에는 이 때 분신한 팔라흐와 자이츠를 위한 추모 십자가가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팔라흐와 자이츠 추모 기념물 (이미지출처: fritsknaapen.nl, VideoBlocks)


바츨라프 광장의 팔라흐 추모 십자가에는 꽃을 갖다놓으며 추모하는 이들이 있다. 함부로 십자가 위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으면 프라하시민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이미지출처: flickr)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과 혁명의 실패에 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프라하의 봄’이라는 다소 외설적인 장면이 있는 19금 영화. 영화가 제작된 뒤에 밀란 쿤데라가 매우 화를 냈다고 하니 영화 외에 원작도 꼭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바츨라프 광장과 국립박물관의 야경 (이미지출처: Vova Novaque)


국립극장 National Theatre

바츨라프 광장 거리 끝까지 와서 교차로에서 좌측 끝 블타바강까지 가면 체코 국립극장이 나온다. 체코에서 가장 권위 있고 국민의 모금에 의해 지어진 상징적인 공연장이다. 


체코 국립극장의 야경 (이미지출처: Thousand Wonders)


18세기 후반 체코는 독립을 하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국민을 위한 변변한 오페라 극장 하나 없을 때였다.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스메타나가 '나의 조국'을 작곡하는 등 독립에 대한 국민의식이 강조되면서 체코어로 제대로 공연할 수 있는 오페라 극장 설립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생기며 복권 발행, 모금활동 등 대대적인 건축비 마련 활동이 진행된다.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국립극장의 모습 (이미지출처: Wallpaper Abyss - Alpha Coders)



1868년 체코 14개 지방에서 가져온 돌로 기초를 놓고, 착공식 때는 전국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6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마치 우리나라의 3.1운동과 같은 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1881년 첫 개관하였으나 얼마 뒤 화재를 입어 지붕, 객석, 무대가 불타버리는 좌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국민의 염원이 담긴 오페라 극장 답게 다시 모금활동과 보수 공사를 거쳐 1883년에 재개관하게 되었다. 


국립극장의 내부 모습 (이미지출처: jaywaytravel.com, Milos Gregor)



체코의 국립극장 관할 아래에는 이외에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극장 중 하나인 스타보브스케 극장과 1983년 건축된 현대식 극장인 신극장이 있다. 

구시가지에 있는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바니가 초연된 곳으로 모차르트가 가장 좋아했던 공연장 중에 하나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스타보브스케 극장의 외부와 내부 (이미지출처: Digimanie)



신극장은 프라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특이한 건축물이다. 스타니슬라프 리벤스키가 4천개가 넘는 브로우잉 글라스 벽돌로 건축하였다. 국립극장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특이한 건물로 신시가지의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거리 풍경이 완전히 변형되어 호불호가 매우 엊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극장의 외부와 내부 장식 (이미지출처: prague.eu)



댄싱 하우스 Dancing House

국립극장에서 강변을 따라 내려오면 댄싱 하우스라는 독특한 모양의 빌딩이 나온다. 


댄싱하우스의 전경 (이미지출처: OrangeSmile.com)



1994~1996년 건축가 프랑크 게리와 프라하 기술대학의 블라디미르 밀루닉 교수가 공동 설계한 건축물로서  미국의 전설적인 페어 댄서인 진저 로저스와 프레드 이스테어가 춤추는 모습을 건축으로 표현한 획기적인 디자인의 빌딩이다. 


진저와 프레드가 실제 춤추는 장면 (이미지출처: The Movie Projector)



왼쪽의 치마입은 형상의 빌딩이 진저, 오른쪽의 모자쓴 정장입은 형상의 빌딩이 프레드다. 빌딩의 원래 이름은 진저와 프레드였으나 댄싱하우스라는 별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7층에는 카페와 함께 전망대가 있어 프라하성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댄싱하우스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과 카페 모습 (이미지출처: Best Tourism best destinations, Prague.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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