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 1 - 카를교

프라하 중심으로 흐르는 블타바 Vltava강, 이 강을 중심으로 중세시대부터 멋진 뾰족탑을 가진 성과 궁전, 성당 등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프라하는 백개의 첨탑을 가진 도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블타바 강을 따라 들어선 프라하의 구시가지 (이미지출처: Prologis)


9세기 프라하성이 지어지며 도시로서 발전하게 된 천년의 고도이기도 프라하는 천년의 세월에 거쳐 다양한 양식 건축물들이 들어서며 시대 변화를 고스란히 도심에 간직하고 있는 유럽의 대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새벽녁의 카를교 모습 - 보통 때는 관광객들로 꽉차있고 이런 운치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지출처: The Prague Visitor)


프라하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4세 (샤를4세, 카렐4세라고도 한다)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은 다른 곳의 제국과는 달리 그 구조가 매우 특이한데 여러 공국의 연합체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단일 황제 중심으로 대대로 세습되는 구조가 아니라 제국 내의 공국들의 왕들이 선거를 해서 황제를 선출하는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었다. 


물론 시기에 따라 가장 명망이 높고 힘이 센 왕이 황제로 선출되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는 다소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체코 지역의 왕이 황제가 되었으니 카를4세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카를4세 동상과 카를4세에 의해 번영한 프라하의 모습 (이미지출처: Prague.fm)


카를4세는 많은 다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수도로 삼았듯이 제국의 수도를 프라하로 삼고 제국의 수도 위상에 맞게 대대적인 개발을 진행시킨다. 카를4세 덕분에 카를교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카를교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원래 이 자리에는 원래 목조 다리가 있었으나 홍수로 유실된 뒤다시 유디틴이라는 석조 다리를 지었다. 하지만 이 다리 역시 부실한 건축기술로 1342년 홍수로 유실되었고, 카를4세가 1357년 다리 전체를 좀더 튼튼한 석조로 짓게 해서 1402년에 완공되었다. 프라하에서 최초로 지어진 석조 다리여서 처음에는 그냥 돌다리라고 불리다가 1870년부터 카를교라고 불리어졌다. 


카를교와 프라하성의 야경 - 카를교 옆에 있는 다리에서 찍으면 이런 모습으로 찍힌다 (이미지출처: Likealocalguide)


다리의 기본 구조는 이런 류의 효시 격이라 할 수 있는 1146년에 지어진 독일의 레겐스부르크의 슈타이네르네 다리와 동일하다. 길이 621m, 너비 10m로서 모두 16개의 교각과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카를교의 교각 모습 (이미지출처: Wallpaper Studio 10)


 

악마의 기술로 만들어진 다리


이 당시 석조 다리 기술은 독일이 가장 앞장 섰는데, 카를교 역시 독일의 페터 파를러 Peter Parler가 맡았다. 파를러는 이곳에 튼튼한 교각을 세우려 했지만 빠르게 흐르는 블타바강에 석회와 모래가 쉽게 휩쓸려 가벼렸다. 


매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할 때 악마가 찾아와 비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한다. 대신 다리가 완공된 후 처음으로 이 다리를 지나는 생명의 혼을 빼앗아가겠다고 제안한다.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파를러는 악마로부터 석회와 모래를 섞은 회반죽에 달걀 노른자를 섞는 방법을 듣는다. 


이렇게 해서 공사가 끝나고 준공식을 하루 앞둔 날, 파를러는 악마가 했던 말에 걱정하지만 이내 꾀를 내 닭이 있는 닭장을 입구에 놔 둔 뒤에 준공식 직전에 문을 열어 닭이 지나가게 할 계획을 했다. 


하지만 악마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파를러 부인에게 친구로 변신해서 파를러가 공사중 위급하다고 빨리 가보라고 알려준다. 다리 앞에는 보초병들이 있었으나 파를러의 부인이기에 들여보내주었고, 결국 준공식에는 닭이 아닌 부인이 먼저 다리를 지나가게 되었고, 악마는 부인의 영혼을 데려가 버렸다. 

 


실제 파를러가 다리 완공 전에 죽었기 때문에 이 전설은 실제 사실이 아닌 허구적인 내용이겠지만 그만큼 어렵게 다리를 놓았고, 또 매우 튼튼한 기술이 들어가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


카를교 교탑의 모습 (이미지출처: sivekhotels.com, Jake and Dannie)


다리의 구시가지쪽에는 교탑 Bridge Tower이 세워져 있어 한층 더 운치있게 만들어 준다. 


카를교는 1841년까지 프라하성과 구시가지를 잇는 유일한 다리로서 카를교의 교탑은 무역을 위해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의 통행세를 거두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탑 위로 올라가면 카를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뷰가 있어 두다리 튼튼하다면 한번 가볼만 하지 않을까...


카를교 교탑에서 바라보는 카를교 (이미지출처: Bridgeinfo.net)


유럽의 많은 다리들이 조각 장식이 잘 되어 있는데 카를교 역시 다리 위에는 모두 30개의 성인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기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어떤 성인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기독교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면 그냥 스킵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성인들의 조각상 중에 특히 머리 쪽에 별이 설치되어 있는 성인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은 한번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카를교 위의 성인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 (이미지출처: katecheza.marianky.sk)


 

얀 네포무크 신부의 일화


이 당시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바츨라프 4세는 이 지역 대주교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영지 또한 인접하고 있어 사사건건 시비가 잦았다. 서서히 강력한 군주로서 세력을 강화한 바츨라프4세는 대주교를 압박하기 위해 프라하성으로 그를 불러드렸으나 대주교는 왕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대신 네포무크 신부를 성으로 보냈다. 


어느날 바츨라프 4세의 왕비가 네포무크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되었는데, 왕은 이 고해성사가 불륜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고 신부에게 어떤 내용인 말하라고 하였으나 신부는 끝내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고해성사는 오로지 신에게만 알려줄 수 있다고 말한 네포무크 신부가 얼마나 미웠을까, 아니면 대주교의 대리인으로서 대주교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 싶었던가 바츨라프4세는 신부의 혀를 뽑고 몸을 묶은 뒤 카를교 아래로 던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프라하에는 좋지 않은 일이 계속 일어났고, 한달 뒤에 전혀 부패하지 않고 머리 주변으로 별의 후광을 받는 모습을 띈 채 강물 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제서야 네포무크 신부의 시신을 잘 거두어 안장하였으며, 이 뒤로 불행의 사건들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네포무크 신부는 1729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성인으로 봉인되었으며, 성 비투스 성당에는 2톤의 은으로 만들어진 성 네포무크 묘가 만들어져 있다.  


성 비투스 성당에 비치되어 있는 성 네포무크의 묘 (이미지출처: intoprague.ru)


카를교의 네포무크의 석상 아래에는 당시 사건을 표현한 동으로 주조된 부조물이 있는데 이 주조물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바츨라프의 강아지] 바츨라프를 평생토록 따랐던 강아지로서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기 바라는 소원

[바츨라프의 요안나 왕비]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다는 소원

[다리에서 떨어지는 네포무크] : 네포무크가 다리 밑으로 던져져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으로 “이 다리에 선 자는 모두 소원을 이룰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저마다 소원을 생각하며 다리에서 떨어지고 있는 네포무크의 모습을 만진다.


성인 네포무크의 조각상 아래 부조물 - 잘 모르면 사람들이 많이 만진 부위를 만지면 된다 (이미지출처: Deposit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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