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트리어의 로마 유적 (로마 제2의 도시) Trier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를 말한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갈리아와 전쟁을 기록한 책인 갈리아전기. 지금도 서점에 가면 사서 볼 수 있는 책으로 당시 갈리아의 풍습, 지리, 기후 등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오늘날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 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면서 로마는 본격적인 영토 확장의 시대를 갖게 되는데, 갈리아 지역의 수도였던 곳이 바로 트리어다.


갈리아전기와 갈리아제국의 영토 - 초록색은 로마의 영토이며, 이후 보라색 부분까지 확대되었다 (이미지출처: 위키피디아)


로마에게 정복당한 뒤 트리어는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여 제2의 로마로서 다양한 로마의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도 그 유적지가 남아 있으며, 이곳에 밀집해 있는 수준 높은 유적지들은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도시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트리어의 로마 유적지들은 유네스코에서도 문화적 가치를 높이 여겨 198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포르타 니그라의 야경 (이미지출처: DeviantArt)


포르타 니그라 Porta Nigra

트리어시의 구 시가지 입구에 있는 건축물로서 검은 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검게 그을린 거대한 출입문으로 트리어시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의 주요 출입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숭례문처럼 도시의 성벽은 사라지고 이제 출입문만 남아 있는게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래도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치형 4층의 벽은 로마 건축 기술이 총 동원된 듯이 매우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포르타 니그라 모습 (이미지출처: Come Across Europe, The Archaeology News Network)


트리어 대성당(성 베드로 성당)과 성모 마리아 성당

성 베드로 성당과 성모 마리아 성당의 기원은 매우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성당들의 기원은 갈리아 지역의 로마 총독이었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머물던 성이 있던 곳에 지어진 성당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황제가 된 뒤, 많이 훼손되어 있던 이 성을 2개의 성당으로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바실리카풍 교회당 2개가 세워졌다. 


트리어 대성당(왼쪽)과 성모마리아성당(오른쪽)의 전면 (이미지출처: Reisezoom.com)


그 후 게르만,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파괴와 개축을 반복하다가 11세기에 트리어 대성당(성 베드로 성당이라 불린다)과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카톨릭교의 역사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역할은 매우 크다. 3~4세기 로마는 1년에 3명의 황제가 바뀐 적도 있을 정도로 권력투쟁의 정점인 시기였다. 워낙 큰 땅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로마 외 다른 지역의 실력자가 로마로 군대를 끌고 와 기존 황제를 끌어내리고 로마 황제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갈리아 지역의 총독으로서 자신 휘하 병력 5만명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고, 당시 황제였던 막센티우스의 군대와 전투를 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전쟁에 앞서 꿈에서 구세주로부터 특별한 모양이 그려진 깃발을 만들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이를 계시대로 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를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되고,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당시 꿈에서 본 깃발 모형은 그리스 알파벳 중 X와 P가 합친 것으로 이후로 카톨릭교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로마제국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으며, 이 때부터 카톨릭은 점점 확대되며 이후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갖게 된다. 

 


라파엘로와 제자들이 그린 '전쟁을 앞둔 콘스탄티누스' (바티칸궁의 벽화, 출처: 위키피디아)


트리어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투박함 속에 웅장함이 엿보이는 남성미를 관찰할 수 있으며, 옆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은 초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좀더 날씬하며 여성미를 엿볼 수 있다. 트리어 대성당은 현재도 매우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예전에는 현재의 크기보다 4~5배 더 컸다고 하니 과거 신성로마제국 시절의 위용은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트리어 대성당의 외부와 내부 모습 (이미지출처: Kurtz Detektei Trier, Taas.iT)


트리어 대성당의 내부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답게 회랑은 매우 소박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돔 부분은 바로크 양식으로 개보수되어 매우 화려한 조각을 볼 수 있다.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성당으로 가져왔다고 하는 예수의 성의로 특히 유명하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몸에 두르고 있던 것이라 하며, 1996년 마지막으로 공개된 이후 현재는 유리관에 보관된 채 대중에 공개는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예수 성의의 공개 모습 (이미지출처: Pinterest, dw.com)


성모마리아 성당의 원래 이름은 립프라우엔키르헤 Liebfrauenkirche로서 사랑스러운(Lieb) 여인(Frauen)의 교회(Kirche)라는 뜻이다. 여느 고딕양식의 성당과 마찬가지로 입구쪽에는 무지개 모양의 팀파눔에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길쭉한 창문에 화려한 스테인레스스틸이 인상적이다. 한가지 다른 성당과 특이한 것은 성당의 구조가 위에서 보면 보통 십자가 형태를 띄는데, 이 성당은 거의 원형으로 이뤄져 비잔틴양식의 특징도 엿볼 수 있다. 


뢰머 다리 (Römerbrücke)

이름부터 로마(Römer)의 다리(brücke)라는 뜻으로 다리가 처음 놓인 것은 152년이다. 거의 2천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는 다리임에도 다리의 모습은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바로 교각 위의 상판이 12세기와 18세기에 두번에 걸쳐 교체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교각처럼 원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본다. 


뢰머 다리 (이미지출처: derweg.org, Vici.org)


목욕탕과 원형경기장

뢰머 다리를 지나면 Barbarathermen과 Kaiserthermen 두 개의 목욕탕을 만날 수 있다. 2세기에 지어진 목욕탕으로 당시 로마의 목욕탕에 이어 두번째로 큰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목욕탕의 흔적만을 볼 수 있다. 


목욕탕을 지나 좀더 가면 원형경기장이 나온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으며, 2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잔디만 남아있어 세월의 아쉬움을 더 느끼게 한다. 


로마 목욕탕 유적지 (이미지출처: Zentrum der Antike)


원형경기장 유적지 (이미지출처: wikipedia)


팔라틴홀(Aula Palatina, 콘스탄틴 바실리카 Konstantinbasilika)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만든 바실리카(보통 공공건물을 뜻한다)로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방으로 나눠지지 않는 단일 공간으로는 현존하는 로마 시대 건축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오래 세월 동안 많은 훼손과 개축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2차세계대전 때는 폭격으로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콘스탄틴 바실리카의 외부와 내부 모습 (이미지출처: Objektiv gesehen, Travel notes)


마르크스 생가 Karl Marx House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은 아니지만 트리어에는 현대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경제학자이자 사상가의 생가가 있다. 바로 마르크스의 집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경제학적으로 풀어내어 러시아와 동구권, 중국을 비롯해 북한까지의 세계 공산주의 국가의 사상적 틀을 제공하였다. 


마르크스의 팬들에게는 좀더 특별한 장소일 수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도 특별히 볼거리가 풍부한 곳은 아니지만 한번쯤 가볼만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의 생가 외부와 내부 (이미지출처: Tripadvisor, news.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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