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텐블로 - 프랑스 왕들이 사랑한 궁전 Fontainebleau

파리에서 남쪽으로 1시간 반 정도 가면 나오는 풍텐블로는 12세기부터 왕실의 궁전과 사냥터로 사용되었으며, 16세기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이곳을 제대로된 궁전으로 확장, 리노베이션을 하게 되었다. 이후 뒤를 이은 200년 걸친 다양한 국왕들에 의해 그들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장식되어 시대 흐름에 따른 왕실 문화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퐁텐블로의 전경 (이미지출처: Kinder Exchange)



하지만 루브르박물관(이전 루브르 궁전)과 베르사유 궁전에 볼거리 측면에서 밀리기에 퐁텐블로 궁전까지 여행을 하는 관광객들은 많지 않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이 궁전과 정원이 매우 화려하면서도 계획적이고 대칭적으로 꾸며져 있다면 퐁텐블로 궁전은 베르사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보일 수 있고 또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고 관리도 베르사유 궁전보다는 덜 되고 있어 이곳에 와서 실망하는 이들도 있는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베르사유궁전의 수많은 인파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이곳은 프랑스 궁전의 매력을 한껏 즐길 수 매력적인 곳이기도 하다. 특히나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14세의 절대왕정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면 퐁텐블로는 실제 프랑스의 국왕들이 살기 위해 또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든 곳이기 때문에 인간미가 훨씬 느껴지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퐁텐블로의 항공 샷과 정원 (이미지 출처: Sotir Paris, Musements)


프랑수아1세

프랑수아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마드리드에 인질로 끌려가게 되었다.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프랑수아1세는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퐁텐블로에 낡은 별궁을 허물고 새로운 거대한 궁을 건축한다. 그리고 르네상스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 이탈리아의 예술가를 데려와 프랑스에 본격적인 르네상스 문화를 도입하게 된다. 


프랑수아1세 갤러리 (이미지출처: Fontainebleau Photo)


이 당시 데려온 로소 피오렌티노는 프랑수아 1세 회랑을 프레스코 양식에 따라 작업하였으며, 프리마티초는 청동상 주조와 함께 에탕페 공작부인의 방, 율리시스 회랑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데려와 이곳에서 작업을 하게 했는데, 이 때 다빈치의 대표적인 그림인 모나리자를 구입하게 된다. 오늘날 모나리자가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루브르에 전시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수아1세 갤러리의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 (이미지출처: Fontainebleau Photo)


프랑수아 1세는 퐁텐블로 궁전 곳곳에 자신의 이니셜인 'F'와 문장인 '불도마뱀'을 새겨넣어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다고 한다. 특히 프랑수아 1세 갤러리는 사방이 'F'로 장식되어 있다.


앙리2세

프랑수아1세에 이어 제위에 오른 앙리2세는 독특한 히스토리가 있다. 앙리2세는 7살 때 아버지 프랑수아1세가 마드리드에서 돌아오는 대신 형과 함께 인질로 마드리드로 끌려가게 된다. 이 때 27세의 아름다운 여인인 디안이 이 어린 왕자에게 입을 맞추게 된다. 볼모로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앙리2세에게는 이 경험이 매우 강렬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된 앙리2세는 왕비가 있었음에도 왕비보다는 이 20살 연상의 여인 디안을 평생 사랑하였다. 


앙리2세의 무도회장 (이미지출처: Pinterest)



앙리2세는 아버지에 이어 퐁텐블로의 궁전의 공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자신이 꾸민 곳에는 앙리의 이니셜 'H'과 디안의 이니셜 'D'로 새겨넣었다고 한다. 또한 디안을 상징하는 3개의 초승달이 겹쳐진 문장도 새겨넣었다. 이들의 이니셜은 앙리2세의 무도회장에 가면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퐁텐블로는 이후에도 국왕들에 의해 화려함을 더해진다. 특히나 절대 왕정을 구가했던 시기의 산물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개인실, 루이13세에서 16세까지 사용하던 가구와 장식품이 있는 방도 화려함으로 치장된 대표적인 곳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개인실과 왕비들의 침실 (이미지출처: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그리고 퐁텐블로 역시 프랑스혁명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혁명을 참여했던 사람들은 퐁텐블로 궁전 역시 약탈과 파괴를 서슴치 않았다. 프랑스혁명으로 그동안 전통적 왕조가 몰락하고 평범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이 승승장구하며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으로 훼손된 퐁텐블로 궁전을 다시 복원하고 역대 국왕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취향을 가미해 궁전을 꾸미게 된다. 황비 조세핀을 위해 각종 가구와 장식용품들이 들어오게 되고, 재혼한 이후에는 마리 루이즈를 위해 또 새롭게 꾸몄다고 한다. 


왕좌의 방과 나폴레옹 박물관의 나폴레옹이 즐겨 입던 모자와 외투 (이미지출처: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은 원래 국왕이 사용하던 방을 왕좌의 방 Throne Room으로 바꾸고 공식적인 회의와 사신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이용했다. 왕좌의 방과 함께 위원회 회의실 Council Chamber는 역시 나폴레옹의 성격과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인데, 대부분의 의자가 등받이가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회의를 해야만 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인지 국정 참여하는 자들이 나태함이나 편안함을 느끼기보다 언제나 긴장감을 갖도록 했으리라 싶다. 


1986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나폴레옹 박물관에는 나폴레옹이 사용했던 물건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황제 대관식에 사용되었던 옷과 비단허리띠, 금 도금된 검, 나폴레옹이 평소에 입었다는 군 복장, 유배지에서 입었던 외투를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의 Council Chamber (이미지출처: Dreamstime,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서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이면서 이후 종신 집권을 위해 쿠테타로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3세 역시 나폴레옹 1세처럼 이 궁전을 꾸미는데 신경을 많이 쓴다.  아래 이미지의 트리니티 예배당 Chapel of the Trinity 역시 프랑수아1세 때 처음 만들어진 뒤 프랑스 혁명에 의해 훼손되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복원, 나폴레옹 3세 때 다시 본 모습을 갖게 된다. 


트리니티 예배당 Chapel of The Trinity (이미지출처: La Vie Locale)


또한 나폴레옹3세 때는 전세계가 제국주의의 식민지 약탈시대에 들어가게 되는데 프랑스 역시 세계 여러 곳에 이러한 식민지를 넓혀나가는데, 퐁텐블로 궁전 입장하자마자 보이는 중국박물관에 중국의 개방을 요구하며 북경을 함락시킨 후, 그곳에서 가져온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외 아시아에서 가져온 가구, 도자기, 장식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폴레옹 3세의 중국관 (이미지출처: Telegraph)


백마 광장과 정원

퐁텐블로 성에서 정원으로 내려오는 계단은 말발굽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페리슈발이라 불린다. 루이 13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독특한 곡선으로 퐁텐블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말발굽 모양의 계단 (이미지출처: Marvelarchitects)



궁전내 광장은 '백마 광장'이라고 부르는데 나폴레옹의 폐위가 이곳에서 진행되었고, 엘바섬으로 유배되기 전에 이곳에서 근위병들에게 이별을 고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별 광장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퐁텐블로의 정원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설계한 르노트르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연못, 분수, 정원은 베르사유의 화려함에 비할 수 없지만 한적하게 시간을 두고 산책을 즐길만 하다. 


퐁텐블로의 정원 모습 (이미지출처: Garden Visit, Tripadvisor)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