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 베를린장벽을 따라 (브란덴부르크문, 홀로코스트추모관 등)

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관리를 위해 연합군은 서독은 미국에 의해, 동독은 소련에 의해 관리되는 분단의 시기를 겪게 된다. 또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1961년 베를린 시내 한가운데에 장벽이 들어서게 된다. 


독일 통일 이후 장벽이 무너졌지만 아직도 베를린 시내에는 이 장벽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또 독일 정부 역시 본인들의 과오를 잊지 않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관리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문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의 중심지였던 주로서 한국의 경기도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브란덴부르크 주가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브란덴부르크문은 일종의 개선문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4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을 받아 1791년에 초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하여 설계되었으며, 문의 상단에는 4두 마차와 승리의 여신인 빅토리아 상으로 장식하였다. 


프로이센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지만 첫 개선의 주인공은 프로이센 군대가 아니라 프리이센과의 전쟁에서 이긴 나폴레옹 군대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돌아갈 때 브란덴부르크의 문 위에 있던 4두 마차 조각상까지 들고 가버렸다. 이후 나폴레옹 몰락과 함께 프로이센이 다시 파리를 점령하면서 이 조각상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나폴레옹 군의 개선프로이센의 나폴레옹 군 격파 이후 개선


19세기 이후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군 및 독일군이 반드시 통과하는 개선문으로 사용되었고, 2차세계대전때 파괴되었다가 195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서독과 동독으로 나눠져 있을 때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동/서 베를린을 나누는 경계선의 기점이 되었으며, 베를린 장벽의 8곳의 검문소 중 하나로서 독일 분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분단이 아닌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었으며,  베를린의 랜드마크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포츠담광장

포츠담광장은 2차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혼잡했던 곳으로, 세계 최초로 신호등이 생긴 도로 교통의 중심지다. 


독일 분단 이후 베를린 장벽에 의해 분리되어 교통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잃어버리고 황량하게 방치되었다. 통일 이후에는 다시 재개발되어 현재와 같이 각종 상업용 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다. 




포츠담광장 주변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공연장과, 베를린영화제가 진행되는 영화관, 소니센터(후지산을 상징하는 흰색의 돔으로 되어 있음), 레고랜드, 악기박물관, 스파이 박물관 다양한 문화 시설들도 함께 들어서 있다. 


소니의 지원을 받아 지은 소니센터, 이곳에 레고랜드도 입점해 있다스파이박물관의 내부 모습 (레이져 통과하기)


베를린필 음악당의 외부 모습외부 모습 만큼 내부 좌석 배치도 매우 독특하다


광장 한 켠에는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관광객들의 사진 무대가 되고 있으며, 도로위에도 장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장벽의 유적이 남은 곳 옆에는 화천군에서 대한민국의 통일을 기원하며 세워진 통일정자를 볼 수 있다.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


브란덴부르크문과 포츠담 광장 사이에는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을 추모하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지상에 추모공원이, 지하에는 추모전시관이 있으며, 2001년 미국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에 의해 설계되었다. 사방으로 늘어서 있는 2711개의 검은 비석들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높이, 너비 등 모두 다르게 제작되어 있다. 4미터가 넘는 비석이 있는가 하면 작은 의자 정도 되는 비석, 밑으로 움푹 꺼진 비석 등도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피터 아이젠만의 설명


적절한 크기의 질서정연한 체계가 너무 크게 확대되어 원래의 의도도니 비례를 벗어나게 될 때, 인간 이상의 상실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격자 체계는 질서 있게 보이는 모든 체계에 잠재된 혼돈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홀로코스트 추모전시관은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충분히 추모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입장객의 숫자까지 제한하고 있다. 전시관 바닥에는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품에서 발견된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에게 이 피할 수 없었던 죽음에 대해서, 살아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그리움에 대해서 간절히 적혀있다.



2차 세계 대전 때 학살당한 유대인은 약 6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Room of Names라는 전시관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한 명씩 차례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모든 이들의 이름을 한번씩 부르는데 6년 8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체크포인트 찰리 Checkpoint Charlie (Checkpoint C)

독일 분단 당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구분하는 베를린 장벽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검문소다. 또한 1961년 장벽이 세워진 후 미국과 소련이 서베를린의 통치를 두고 서로간 탱크를 대치시켰던 것도 이곳이다. 



소련은 서베를린을 완전히 동독의 영토로 포함시키기 위해 서베를린을 통신, 물자 등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영국와 미국은 항공기를 이용해 서베를린을 위해 물자를 공급했었다.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 350만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했었으니 동독과 소련 입장에서는 장벽을 세워 이를 막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장벽수립 후 이곳에서 양쪽 포로교환을 했던 장소이기도 스파이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였다. 



1989년 독일 통일과 함께 1990년 체크포인트 찰리는 제거되었고 현재는 관광지로서 사진촬영을 위해 당시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이듬해 베를린 장벽의 동쪽에 전세계 21개국 118명의 예술가들이 그린 105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1.3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공개 갤러리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아픈 과거를 잊지 말고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띄고 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모습형제의 키스


형제의 키스


러시아 드미트리 브루벨이 그린 작품으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호네커가 동베를린에서 만나 실제 키스했던 사진을 재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주여, 이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도와주소서"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자유와 평화를 갈망했던 동독인들의 바람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유명한데 유명한 만큼 훼손도 심했으나 2009년 다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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